“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 혼자라도 사용자 중심으로 디자인하고 싶다면”
2019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채용 공고는 온통 UX/UI 디자이너만 찾고 있었고 어느새 경력만 차버린,
애매한 능력의 웹 디자이너인 저로서는 갈 곳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사용자 경험 디자인? 그동안 나름 사용자 입장을 고려해 디자인 했지만 결국 내 관점에 불과했고··· 앱 디자인은 해본 적도 없는
데··· 나, 다시 취업할 수 있을까?’
2008년부터 약 10년간 웹 디자이너로 일해온 저는 별다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무인도에 표류된 기분이 들어 막막했습니다.
‘막막해한다고 해결되는 게 있나. 공부하자.’
그렇게 UX/UI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우연히 ‘데이터 드리븐 UX’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디자인이 정말 사용자를 위한 것이었을까?’
저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해 늘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저는 꼭 데이터 기반으로 일하는 조직에 들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몇 달을 준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데이터 드리븐으로 일한다는 작은 스타트업에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그곳은 이름만 데이터 드리븐이었을 뿐,
실제로는 데이터를 거의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만들고 싶은 제품이 정해져 있었기에 당장은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 회사의 사정이고, 저는 여전히 데이터 기반으로 일하고 싶었죠.
그래서 이직을 반복했습니다.
정말 그런 조직을 찾고 싶었으나 현실은 이상과 달랐습니다.
매번 면접에서 확인했음에도 막상 들어가 보면 달랐습니다.
저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거나, 리더가 바뀌면서 의사결정 구조가 변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맞는 동료를 만나 기뻤던 것도 잠시,
그 동료가 떠나면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엔 ‘내가 부족한가?’ 싶어 밤새 GA와 같은 사용자 데이터 수집 도구를 익히고 다른 회사의 사례도 찾아봤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결국 내가 메워야 하는 것이구나.”
그 순간부터 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지치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우물을 팠더니 점점 제가 속한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 가치도 함께 상승해 연봉도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2년 만에 연봉의 앞자리가 세 번 바뀌었고, 사이닝 보너스와 스톡옵션, 현금성 복지까지 더하면 네 번이나 바뀐 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요즘의 UX/UI 디자이너, 프로덕트 디자이너 채용 공고에는 어김없이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 정량/정성 데이터 기반 문제 정의 역량
● 데이터 기반 UX 개선 경험
● 사용자 리서치를 통한 인사이트 도출
어느새 디자이너에게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역량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비즈니스 관점까지 함께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역량을 갖춘 사람만이 채용의 문을 통과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현실도 그 역량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환경이 필수여야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여전히 몇 년 전 제가 겪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스타트업에는 데이터 분석가도, 유저 리서처도 없습니다.
정제된 데이터도 없고 프로젝트의 목표는 흐릿하며 같이 토론할 팀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결국 UX/UI 디자이너 또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혼자서 우물을 파기 시작합니다.
문제를 정의하고, 지표를 고르고, 사용자의 흔적을 더듬으며 추정해봅니다.
그러나 사용자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그 시도는 때때로 ‘회사 사정도 모르고 오버하는 사람’이라는 오해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스타트업의 창업자 역시 난감합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에게 데이터로 의사결정하는 역량을 요구해야 한다’고 듣긴 했으나 사실 본인들도 디자이너의 그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창업자는 단지 시장의 어떤 문제를 바꾸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스타트업을 시작했지만 회사 운영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제품 출시는 계획보다 늦어지고 고객 반응도 생각보다 별로인 것 같습니다.
투자금은 빠르게 없어지는데 월급 주는 날과 월세 내는 날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하루하루가 울고 싶습니다.
결국 초조해진 창업자는 기능 중심으로 업무를 분배하기 시작하고 디자이너에게 세세한 작업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내 마음도 모른 채 자꾸 사용자 타령만 하니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이 둘 모두에게 안타까운 점은 ‘사용자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를 위한 데이터 활용’,
‘데이터 기반 디자인 의사결정’이 회사의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디자이너가 과거의 저처럼 그 간극을 혼자서 메우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썼습니다.
제 경험과 노하우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오늘도 혼자서 우물을 파고 있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나 같은 게 뭐라고’라는 생각은 떨쳐내고 썼습니다.
이상적인 환경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디자이너들을 위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라도 사용자 중심으로 디자인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디자이너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 책은 데이터 분석가도, 분석 도구도, 정제된 데이터도, 협업자도 없는 현실 속 디자이너가 혼자서도 사용자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해석하고, 인사이트를 얻고, 문제를 정의하고, 솔루션 방향을 정하고, UX 흐름에 반영하고, UI 디자인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을 담은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가이드입니다.
복잡한 수식도 통계 이론도 없습니다.
어려운 개념은 최대한 쉽게 풀었고 모든 내용은 ‘현실에서 진짜 쓸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풀어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원론적인 이야기, 방법론, 추상적인 말은 모두 걷어내고 실무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과 예시를 담았습니다.
예시 속 주인공인 ‘아홉’과 ‘초록’은 과거의 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당신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디자이너가 왜 사용자 데이터를 봐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결국 나의 무기가 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도 함께 다룹니다.
‘이런 상황에선 이런 한계가 있었다’, ‘이럴 땐 이렇게 타협했다’는 아름답지 않은 현실적인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때로는 ‘그런 곳에서는 떠나야 한다’고 말하기도합니다.
나의 최선이 환경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사실, 그 조언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조용히 반복됩니다.
이 책은 실무에서 ‘어디까지 혼자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혼자서도 어떻게 설계해낼 수 있는지’를 기록한 생존형 UX 가이드입니다.
실제로 제가 겪은 좌절과 시행착오, 실패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빡친 사람’이 그럼에도 살아남고자 했던 몸부림의 기록이고 성장통의 흔적입니다.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당신도 데이터를 통해 문제를 정의하고,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고, 나아가 자신의 디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완독을 목표로 하고 쓰지 않습니다.
책상 위에서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며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책, 그리고 언젠가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게 되는 책.
그것이 이 책이 꿈꾸는 자리입니다.
읽는 내내 혼자라는 생각이 조금은 덜어지고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마음속에 자라나길 바랍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화가 나고 실망스러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 혼자라도 사용자 중심으로 디자인하고 싶은 당신’에게,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당신의 자리는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길 바랍니다.
2025년 여름에,
이미진(란란)
데이터 삽질 끝에 UX가 보였다
: 스타트업 전문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들려주는 현실 데이터 드리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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