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조선 시대 선비들은 평생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을까 궁금해졌다.
조사해 보니 조선의 지식인이라면 사서오경을 비롯해 <소학> 같은 성리학 서적과 <사기> 같은 역사서, 여러 문집 등을 읽었겠지만, 교육의 중심이 된 핵심 텍스트의 양은 놀랄 만큼 적었다. 사서오경의 원문은 모두 합쳐 약 26만 자로, 오늘날 300~400쪽짜리 책 두 권 정도 분량이다. 주석서와 다른 책들을 더해도 평범한 유생이 공부한 텍스트의 총량은 요즘 책 수십 권 분량을 넘기기 어려웠을 거 같다. 물론 한문과 현대 한국어는 글자당 정보량이 다르므로 어디까지나 단순한 문자 수 비교다.
대신 같은 책을 무섭도록 반복해서 읽었다. 사서오경의 구절을 외우고 주석을 익히고, 글을 지을 때 다시 끌어다 썼다. 책 한 권을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요즘의 독서와는 상당히 달랐다. 새로운 정보를 계속 받아들이기보다는 한정된 텍스트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쓴 셈이다.
AI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조금 짓궂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훈련 데이터는 적은데 같은 데이터로 학습을 너무 많이 한 것은 아닐까? 일종의 과대적합(overfitting)이다. 물론 사람은 책을 읽은 뒤에도 사색하고 토론하고 현실에 적용하며 끊임없이 배움을 업데이트한다. 그래도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틀이 한정된 고전과 성리학적 해석에 강하게 맞춰졌다는 점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도 있다. 하나의 관점만 익힌 채 세상의 모든 문제를 그 틀로 설명하려 들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 보인다. 다양한 책을 많이 읽으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스스로도 자부하는 엄청난 다독가가 있다. 그분의 독서량은 나와는 자릿수가 다를 것이 분명했다. 그 덕분인지 어떤 주제라도 지식을 술술 쏟아냈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는 게 많은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저건 분명 아닌데’ 싶은 이야기를 너무도 당당하게 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다. 워낙 자신 있게 말하니 현장에서는 ‘내가 잘못 알았나’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내가 맞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는 건 나중에 따로 확인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런 면도 있다는 얘기일 뿐, 전반적으로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이 외에도 여러 경험을 통해 책을 많이 읽는 것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다른 능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책을 읽으면 당연히 접하는 정보의 양도 늘고 세상을 보는 창도 많아진다. 하지만 읽은 정보가 맞는지 따져보고, 모순되는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 판단하고, 무엇보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어디부터 모르는지를 아는 능력까지 독서량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2022년 말 ChatGPT가 등장했다. 무엇을 물어도 그럴듯한 답을 술술 내놓았다. 인간이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양의 글을 학습했으니,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다독가가 나타난 셈이었다. 하지만 명확히 틀린 얘기까지 너무도 뻔뻔스럽게 풀어놓는 모습에 문득 예전의 그 다독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 읽을 수 없을 많은 글을 읽힌 인공지능은 대체 무엇을 배운 것일까.
마침 이번에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딥러닝 6>을 번역하면서 이 과정을 기초부터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이번 6편의 주제는 ChatGPT의 근간인 대규모 언어 모델(LLM)이다. 책에서는 LLM을 만드는 과정을 크게 사전 학습과 사후 학습으로 나누는데, 사전 학습을 사람에 빗대면 ‘많은 책을 읽으며 언어 능력과 기초 지식을 쌓는 단계’라고 설명한다.
LLM의 기본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앞에 나온 단어들을 보고 그다음에 올 단어를 맞힌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고양이를”까지 보여주고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올지를 예측하게 하는 식이다. LLM은 이런 문제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풀면서 다음에 나올 단어뿐 아니라 언어에 숨어 있는 수많은 패턴을 익힌다. 문법과 문체는 물론이고 텍스트에 담긴 세상에 관한 지식도 어느 정도 모델 안에 스며든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앞서 이야기한 다독가의 궁극적인 형태가 LLM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글을 읽었고, 거기서 발견한 패턴을 바탕으로 무슨 질문에든 그럴듯한 다음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번 책을 번역하며 새삼 흥미로웠던 점은 그렇게 많이 읽히는 것만으로는 ChatGPT 같은 AI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전 학습을 마친 LLM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답할 줄 모른다. 그래서 사후 학습으로, 사람이 질문하고 답하는 사례를 보여주며 지시를 따르는 법을 가르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같은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수없이 많다. 사실에 부합하는 답과 틀린 답도 있고, 유용한 답과 쓸모없는 답도 있다. 지나치게 장황할 수도 있고,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어떤 답이 더 좋은지’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사람의 피드백이 들어간다. 같은 질문에 모델이 내놓은 여러 답을 사람이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지 평가하고, 그 선호를 모델이 학습하게 한다.
아직도 끝이 아니다. 수학 문제처럼 정답이 명확하거나, 프로그램처럼 테스트를 돌려 결과가 맞는지 판정할 수 있는 문제라면 사람이 개입할 필요조차 없다. 문제를 풀게 한 뒤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자동으로 판정해 다시 시도하게 할 수 있다. 이를 반복하면서 모델 스스로 더 좋은 문제 풀이 방법을 찾아간다.
기타 등등..
사람 역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배우지는 않는다. 문제를 풀어보고, 틀리고,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고, 생각을 글로 써보고, 토론하다가 반박당하기도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과 맞지 않는 경험도 한다. 그런 피드백을 거치면서 처음 읽었을 때의 지식이 조금씩 자기 것이 된다. 그럼에도 생각할 재료를 풍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많이 읽기의 중요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재미난 얘기는 이제부터다. 우리는 읽는 일 자체를 AI에 맡기기 시작했다.
마침 얼마 전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제목에 끌려 홀린 듯이 사 읽었다. 원제는 <Reader Bot: What Happens When AI Reads and Why It Matters>다. 우리말 제목은 ‘읽지 않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췄지만, 원제는 오히려 ‘읽는 AI’를 앞세운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뒤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글을 생성하는, 즉 ‘쓰는’ 능력에 쏠렸다. 요즘은 AI를 써서 보고서를 쓰고, 코드를 쓰고, 소설을 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보다 앞서 일어나는 일을 보라고 한다. AI가 쓰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이제 AI는 글을 요약하고, 여러 문서를 비교하고, 문서에 관한 질문에 답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 ‘읽기’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수행하게 된 것이다.
묘한 일이다. 우리는 인간이 평생 읽을 수 없는 양의 글을 기계에게 읽혔다. 그 결과 무엇이든 물어보면 대답하는 엄청난 다독가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에게 이제는 우리가 읽어야 할 글까지 대신 읽히고 있다.
나부터도 그렇다. 잘 읽히지 않는 기획안이나 원고를 받으면 먼저 AI에게 요점을 정리해 달라고 한다. 이런 일에는 나보다 AI가 빠르고 효율적이다. 이렇게 핵심과 큰 줄기를 파악한 후 원문을 읽으면 내용이 훨씬 잘 들어온다.
그러니 AI에게 읽기를 맡기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일 리는 없다. <읽지 않는 사람들> 역시 AI를 독서에서 몰아내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읽느냐’에 있다. 저자는 AI가 인간 대신 읽을 수 있게 된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굳이 AI가 아니더라도) 이미 자발적인 독서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AI에게 읽기를 넘기는 것이 인간의 읽기 능력과 동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걱정한다.
단순히 정보 얻기가 목적이라면 AI가 읽어주는 것으로 충분한 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의 목적은 다양하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생각을 한동안 따라가게 된다. 어떤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대목에서는 ‘정말 그런가?’ 하고 멈춘다. 앞에서 읽은 내용과 뒤에서 읽은 내용이 연결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책이나 오래전 경험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되돌아가 다시 읽기도 한다. 소설이라면 등장인물의 선택을 이해해 보려 애쓰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기도 한다. 요약문에는 결론이 남지만 이런 과정은 대부분 사라진다.
편의 때문에 무심코 읽기마저 AI에 넘기다 보면, 글을 읽는 과정에서 내 머릿속에서 일어났을 수많은 작용도 함께 놓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AI 시대에는 ‘많이 읽기’ 못지않게 ‘무엇을 직접 읽을 것인가’가 중요해질 것 같다.
이번 글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많이 읽으면 똑똑해질까?”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은 비교적 적은 종류의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 덕분에 몇몇 텍스트를 놀라울 만큼 깊이 자기 것으로 만들었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틀 역시 그 텍스트에 강하게 영향받았을 것이다.
반대로 세상을 놀라게 한 AI도 많이 읽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방대한 텍스트를 읽힌 후에도 다양한 기법을 동원해 더 학습시켜야 비로소 사람이 기대하는 수준의 답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의 공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읽은 것을 생각해 보고, 의심하고, 다른 지식과 연결하고, 써먹어 보고, 고치는 과정이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정보를 찾고 정리하는 일은 앞으로 더 많이 AI에 맡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읽는 경험 자체가 중요한 읽기까지 AI에 위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AI가 아무리 훌륭하게 요약해 줘도, 그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했을 것들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딥러닝> 1편을 번역할 때만 해도 AI가 정말 쉬워 보였다. 어느덧 10년이 지나 6편까지 번역을 끝낸 지금 느낌은 전혀 다르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배울수록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보인다. 그 사이 AI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고, 이제는 내가 읽고 쓰고 생각하는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이렇듯 10여 년을 AI와 가깝게 지내며 내게 남은 질문은 뜻밖에도 AI보다 나에 관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AI에게 읽히고, 무엇을 직접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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