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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도입하기 전에, 일부터 다시 설계해야 하는 이유

AI를 도입하기 전에, 일부터 다시 설계해야 하는 이유

작업은 빨라졌지만 일은 끝나지 않는 팀을 위한 업무 흐름과 판단 기준

 

최윤석 Principal Tech PM,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어떤 업무부터 AI로 자동화하면 좋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저는 그 업무가 끝날 때까지 거치는 과정부터 확인합니다. 누가 시작하고, 누구에게 넘기며, 어디에서 가장 오래 기다리는지가 중요합니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과 일을 늦추는 구간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장비 정산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정산서 작성 시간은 줄었는데 승인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 요청이 멈춰 있다면, 작성 자동화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AI 도입의 출발점을 고를 때 이 차이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장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정산 요청이 열흘째 결재함에 멈춰 있습니다. 1차 승인 담당 덤덩자는 출장 중인데, 그가 없을 때 대신 승인할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총무팀은 어떤 요청이 얼마나 오래 묶여 있는지 한눈에 보지 못합니다. 정산서는 빨리 만들 수 있게 됐지만, 정산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승인 과정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병목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흐름 설계의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그렇다면 정산서를 빨리 쓰게 된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요?

 

 

빨라진 작업과 끝난 일은 다르다

 

정산서를 쓰는 시간이 줄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신청자의 수고는 덜어집니다. 다만 작성 시간을 줄인 것과 승인 대기 시간을 줄인 것을 같은 성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작성은 한 사람이 하는 작업이지만, 정산은 여러 사람을 거쳐야 끝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산은 정해진 승인 절차를 거쳐 정산 결과가 신청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마무리됩니다. 끝을 이렇게 정의하면 정산서 작성은 시작점일 뿐입니다. 아무리 정산서를 빨리 작성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대기 시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맥킨지가 2026년 8월 발표한 연례 AI 현황 조사는 영업 이익의 5% 이상이 AI 활용에서 나왔고 그 효과가 "상당하다"고 답한 응답자를 "고성과 조직"으로 분류했습니다. 전체 응답자의 약 6%입니다. 이들 가운데 약 4분의 3이 AI 활용을 계기로 업무 흐름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했다고 답했고, 나머지 응답자에서는 그 비율이 4분의 1에 그쳤습니다.

 

보고서는 고성과 조직이 기존 흐름에 AI를 끼워 넣기보다 흐름 자체를 다시 설계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 조사 내용만을 가지고는 재설계 덕분에 성과가 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성과를 냈다는 조직일수록 흐름을 다시 설계했다고 답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다시 설계해야 할까요?

 

 

자동화 도입 전 업무의 병목 구간부터 진단하기

 

자동화 대상 후보를 고를 때 가장 흔한 실수는 눈에 띄는 단순 반복 작업만 고르는 것입니다. 흐름이 복잡하거나 불분명한 업무에 답변을 넘어 다음 작업까지 수행하는 AI 에이전트를 도입하면, 자동화는 기존 문제를 더 빠르게 반복할 뿐입니다. 

 

그래서 업무 흐름을 세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길 권합니다. ❶ 일이 어떤 단계와 담당자를 거치는지 (흐름), ❷ 어디서 지체되고 되돌아오는지 (마찰), ❸ 자동화하기 전에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재설계 후보)를 차례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관점을 출장비 정산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 요청은 신청자, 1차 승인 담당자, 총무팀을 거치며 적어도 두 번 사람의 손을 거칩니다. 마찰을 기준으로 보면, 가장 오래 대기하는 구간은 작성 단계가 아니라 승인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시점입니다. 필수 증빙이 누락되거나 잘못 첨부되어 요청이 반려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자동화 전에 개선할 지점이 두 곳으로 좁혀집니다. 승인 담당자가 부재중일 때 누가 대리 승인하는지, 증빙에 문제가 있을 때 요청을 어디로 반려하는지 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파악한 지점을 개선하는 방법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통합은 여러 사람이 순차적으로 확인하던 단계를 하나로 모으는 것, 제거는 생략해도 결과에 영향이 없는 단계를 없애는 것, 명확화는 불분명했던 기준과 예외 사항을 명확히 하는 것, 표준화는 입력과 출력의 양식을 통일하는 것입니다. 다만 특정 단계를 제거하기 전에는 해당 단계가 담당하던 책임과 품질을 누가 대신 담보할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규정상 필요한 단계를 임의로 건너뛰는 것은 재설계가 아닙니다.

 

네 가지 방법을 출장비 요청에 적용하고, 바꾼 뒤 확인할 점까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같은 요청이 세 가지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방법

출장비 요청에서 할 일

바꾼 뒤 확인할 것

합치기(Combine)1차 승인 담당자와 총무팀이 같은 항목을 차례로 확인한다면 한 번으로 합칠 수 있는지 검토합친 뒤에도 책임과 품질이 유지되는가
제거(Cut)규정에는 없는데 관행처럼 남은 중간 보고나 확인 단계가 있는지 점검없앤 뒤 위험이 커지지 않는가
명확화(Clarify)승인 담당자가 자리를 비우면 대신 승인할 사람, 증빙에 문제가 있으면 돌려보낼 곳을 지정모호한 기준이나 드러나지 않은 판단이 남아 있지 않은가
표준화(Standardize)필수 증빙 목록, 정산서 양식, 요청이 끝났다고 볼 시점을 통일같은 상황에서 늘 같은 결과가 나오는가

 

 

 

 

 

 

 

 

 

작성만 빨라진 흐름에서는 작성 구간만 달라졌지만, 다시 설계한 흐름에서는 길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설계한 흐름을 들여다보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여기서 AI는 정확히 어디에 필요할까요?

 

 

 

AI가 필요 없는 일도 있다

 

업무를 정리하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❶ 절차만 바꾸면 되는 일

대리 승인 담당자를 지정하고 부재 시 경로를 합의하는 일은 AI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합의로 해결됩니다.

 

❷ 규칙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

승인 범위를 정리한 표와 부재 정보만 있으면, 정해진 경로로 요청을 보내고 기한을 알리고 진행 상태를 보여 주는 일은 지금 쓰는 결재 시스템의 규칙으로도 충분합니다. 요청 내용이 제각각이라 해석이 필요하다면, 에이전트가 요청을 읽고 경로 지정과 알림을 맡도록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❸ AI가 도울 수 있는 일

형식이 제각각인 영수증과 설명을 읽어 항목을 정리하고, 확인이 필요한 부분을 표시하는 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쓸지는 품질과 비용을 확인한 뒤 정합니다. 흐름을 정리하는 일에도 AI를 쓸 수 있습니다. 담당자의 설명을 바탕으로 단계와 대기 지점을 정리하게 하거나, 빠진 질문을 찾아 달라고 하는 식입니다. 다만 그 결과를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누가 책임질지는 사람이 정합니다.

 

AI 에이전트를 다루는 글에서 AI가 필요 없는 일을 꺼내는 것이 의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구를 고르기 전에 먼저 해결할 문제를 확실히 정해야 합니다. 어느 갈래든 승인 범위와 이관 기준을 사람이 먼저 합의해 두지 않으면 흐름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AI가 맡는 구간에서는 무엇을 미리 정해 두어야 할까요?

 

 

업무 자동화에 앞서 승인 기준 통일하기

 

계속해서 출장비 정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교통비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떤 승인 담당자는 그동안 영수증 없는 택시비를 사유만 적으면 인정하고, 다른 담당자는 반려해 왔다고 해 봅시다. 직원들은 이런 차이를 경험으로 알고 피해 가거나, 모르면 옆자리 동료에게 묻습니다. AI는 따로 정해 두지 않으면 기준이 비어 있는 자리를 그럴듯한 추정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기준을 정리하지 않은 채 자동화하면 그 불일치까지 함께 자동화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AI에게 맡기기 전에 담당자들 사이의 기준부터 맞춰야 합니다.

 

물론 모든 추정을 막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날짜 표기를 맞추는 정도라면 맡겨도 되지만, 금액이나 지급 여부처럼 책임이 걸린 항목은 추정하지 말고 묻게 해야 합니다. 무엇을 추정해도 되고 언제 멈춰서 물어야 하는지,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이 사람의 몫입니다. 이 경계는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며 적어 둘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이 끝났을 때 결과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결과물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상황에서 AI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나에게 물어야 하는가?"

지시문에 세 질문에 대한 답을 적었다고 설계가 끝나지는 않습니다. 금지한 행동을 AI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는지, 예외 상황이 담당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이 사례에서 승인은 끝까지 사람이 하고, AI에게는 승인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은 누구와 함께 정해야 할까요?

 

 

전체를 살피되, 시작은 작게 합니다

 

먼저 오해 하나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업무 흐름 전체를 살피라는 말이 회사의 모든 업무를 정립한 후에야 AI를 도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체 흐름은 문제를 진단하고 성과를 측정하는 범위이고, 일을 맡기는 범위는 작은 구간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즉 진단은 넓게, 위임은 작게 진행하는 것입니다. 제목의 '붙이기 전에' 역시 AI 도입을 미루라는 뜻이 아니라, 실제 업무를 맡기기 전에 운영 기준부터 합의하라는 의미입니다.

 

맡길 구간의 기준은 혼자 정하지 않습니다. 신청자와 승인 담당자, 그리고 총무팀 같은 운영 책임자가 시험 범위와 판단 기준을 함께 확인합니다. 신청자는 정산서를 빨리 냈는데 승인 담당자의 대조 작업이 늘었다면, 부담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옮겨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한 팀의 정산서 초안 작성 구간만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정상 건뿐 아니라 증빙이 빠지거나 금액이 맞지 않는 건도 함께 확인합니다. 작성 시간이 줄었는지, 승인 담당자의 검토 부담이나 누락이 늘지 않았는지를 기존 방식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합니다. 초안 작성이 빨라졌더라도 승인 대기가 그대로라면 그 원인은 따로 살펴야 합니다. 시험 결과가 기대와 다르면 사람이 처리하던 기존 방식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미리 확인해 둡니다. 맡기는 범위는 작아도, 성과는 일의 끝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출처: 『일하는 AI에이전트, 설계하는 사람』p.352

 

다음 AI 도입 회의에서 먼저 확인할 것

 

처음의 출장비 요청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흐름을 다시 설계한다고 문서를 승인해줄 담당자의 부재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시 설계한 흐름에서는 누구에게 넘기고, 언제 다시 확인하며, 응답이 없으면 어디로 이관할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막힌 요청을 찾아내 다음 단계로 넘길 수 있습니다.

 

다음 도입 회의에서 "어떤 업무부터 AI로 자동화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이 나오면, 최근 처리한 업무 한 건을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길 권합니다. 어느 단계에서 가장 오래 멈춰 있었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입니다. AI를 붙이기 전에 일을 다시 설계한다는 말은 결국 이것입니다. 전체 흐름을 보고, 작은 구간부터 맡기는 것. 그 첫 설계를 그려 볼 틀을 아래에 정리했습니다.

 

업무 하나에 대입해 보는 여덟 항목

 

아래 여덟 항목은 책『일하는 AI 에이전트, 설계하는 사람』의 내용을 이 글의 목적에 맞게 종합한 작성 양식입니다. 각 항목 옆에 관련 장을 표기해 두었습니다. 메모장이나 문서에 옮겨 적어 작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모든 항목을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최근 처리한 한 건의 흐름을 작성하고, 가장 큰 병목 지점 하나를 표시한 뒤, 다음 담당자와 논의할 질문 하나를 정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초안이 됩니다.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항목은 '확인 필요'로 남겨 두시면 됩니다.

 

  1. 업무와 원하는 결과: 업무 이름은 무엇이고, 누가 어떤 결과를 받아야 끝나는가 (5장)
  2. 현재 흐름: 시작 → 담당자와 단계 → 결과 전달 (5장)
  3. 막히는 곳과 근거: 어디서 기다리거나 되돌아오는가, 그렇게 판단한 기록이나 사례는 무엇인가 (5장)
  4. 먼저 바꿀 것: 통합, 제거, 명확화, 표준화 가운데 적용할 변화 하나와, 바꿔도 책임과 품질이 유지되는지 확인할 기준 (5장)
  5. 역할 나누기: 사람이 할 일, 기존 시스템으로 처리할 일, AI가 보조할 일 (5장)
  6. 판단 기준: 완료 조건, 금지할 결과나 행동, 사람에게 물어야 할 상황 (1장, 2장)
  7. 책임과 시험: 기준에 합의할 사람, 작게 시험할 범위, 문제가 생기면 돌아갈 처리 방식 (10장)
  8. 효과 확인: 지금의 전체 처리 시간과 검토 부담, 시험 뒤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값 (7장, 10장)

 

채우기 어려운 항목이 있다면 표기된 관련 장부터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양식을 채우다 보면 AI에게 맡길 작업보다 구성원들이 먼저 합의해야 할 사항이 더 많이 확인될 수 있습니다. 다소 우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과정이 바로 앞에서 강조한 업무 재설계의 출발점입니다. 흐름과 기준이 정립된 구간에서는 AI가 담당할 역할이 명확해지고, 그 결과물에 대한 검증 기준도 함께 수립됩니다. AI를 도입하기 전에 업무를 다시 설계하는 것은 AI가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사전에 조성하는 일입니다.


위 글은 『일하는 AI 에이전트, 설계하는 사람』최윤석 저자가 작성한 특별 기고문입니다.

 

『일하는 AI 에이전트, 설계하는 사람』은 AI 에이전트를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일을 맡기는 방법을 다루는 도서입니다. 이 글에서 따라간 자동화 후보 발굴과 업무 흐름 재설계 기준은 5장 후반부에, 첫 프로젝트의 범위와 책임, 성공 기준을 정하는 방법은 10장에 담았습니다. 어디까지 맡기고 어디서 사람이 개입할지는 1장과 3장에서, 권한과 안전장치는 8장에서 이어집니다. 

 

도구가 바뀌어도 남는 판단 기준을 찾는 실무자와 리더에게 다음 걸음이 되어 줄 책입니다. AI에게 무엇부터 맡길지 고민하는 실무자와 리더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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